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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하게 성실히 살면 더 나은 세상이 될 거라는 당신들의 천국

잘 모르는 사람들이 뒤섞인 술자리에서, 옆 테이블이 정치 이야기로 넘어가는 것을 엿듣게 되었다. 키가 크고 순한 인상을 한 남자는, 항상 부모님이 지지해 오셨던 어느 여당 정치인에게 이번 대선에서 자신의 표를 행사했다고 말했다. 물론, 그 후보는 당선이 되었다.

그 테이블에서는, 일반적인 그 연령대의 술자리에서 볼 수 있는 격한 반응은 없었지만, '그래도 본인의 신념대로 해야지 부모님이 지지한다고 표를 행사하는 건 좀..' 정도의 말이 나왔다. 그 사람은 '나는 열심히 일하고 성실히 세금을 내며 법을 지키는 사람으로, 내가 열심히 노력하고 살면 된다고 생각한다, 정치적 입장 같은 건 중요치 않다'고 말했다.

 

이런 사람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우기지도 않고 화를 내지도 않고 예의 바르게, '자신의 정치적 신념, 그런 게 왜 중요하죠. 부모님 뜻에 따르는 것, 그리고 열심히 착하게 사는 것만으로도, 저는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드는데 일조하고 있는 거라고 믿어요'라고 말한다.

경험상, 그리고 내가 인구조사할 수 있는 범위 내애서, 지난 대선에서 여당을 지지했던 많은 사람들은 공적인 자리에서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밝히는 것 자체를 자제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 와중에도 드물게 이렇게 자신의 입장을 피력하는 '사실상 정치적 무관심자'를 이따금 마주치게 된다.

세상에는 많은 일이 일어나고 있고 정치는 정치대로 숨가쁘게 흘러가지만, 그건 어쩌면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인간의 본질과 삶의 순리는 변하지 않으니, 우리는 그냥 자신의 삶을 성실히 살아가는 것으로 충분하다, 뭐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그럴 때 마다 나는 한 여자를 떠올린다. 그녀의 이름은 가이아르 부인이다. 20대 후반의, 세상 풍파를 다 겪은 여자. 어릴 때 이마를 부지깽이로 맞은 뒤 후각을 상실하면서 감정도 메말라버려 기쁨과 슬픔도 느끼지 못하게 된 여자다.

 

바로,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향수'의 주인공인 그르누이가 태어난 후 맡겨지게 된 보모, 바로 그 사람이다.

 

냄새가 없는 동시에 타인의 냄새는 구석구석 맡고 해석할 수 있는 아기 '그르누이'는, 모든 유모들이 어쩐지 기분이 나빠지고 친밀감이 생기지 않는다며 꺼려하는 아기였지만 가이아르 부인은 그 아이의 특징을 눈치채지 못하고 두말 없이 맡았고 키웠다.

공정함, 성실함, 질서, 편애 없음.... 절대 부당함 없이 모든 아이들을 공평하게 키우는 그녀에게서 그르누이는 무럭무럭 자랐다. 

그리고 예닐곱살이 된 그르누이에게, 가이아르 부인은 약간의 특이한 점을 발견하고 찝찝함을 느끼게 된다. 그르누이가 여덟살이 되던 해 수도원에서 그르누이를 돌보는 대가로 지불하는 돈이 밀리자, 가이아르 부인은 수도원에 알아보거나 재촉하지도 않고 일주일만 딱 기다려준 다음, 그르누이를 무두장이 그리말에게 팔아버린다.

(그리말이 아주 악독한 인간임을 모르는 바가 아니었으나 그녀가 특별히 도의적 책임감을 느낄 이유는 없었다.)

 

가이아르 부인은 그 뒤에도 성실하고 공정하게 아이들을 돌보면서 살아간다. 말년에 고통받거나 가난과 외로움 속에 죽지 않기 위해 차곡차곡 돈을 모으는 것만이 그녀의 삶의 목적이었다.

그렇게 40년이 지나 가이아르 부인은 보모 일을 끝내고 집을 사서 세를 받고 죽음을 기다렸지만 죽음은 오지 않고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다. 그리고 혁명을 계기로 그 동안의 모든 사회적 도덕적 관계가 무너진다.

그리고 10년 사이, 그녀가 받는 집세는 주화가 아닌 작게 인쇄된 지폐로 바뀌었는데 이것이 그녀의 재산의 몰락을 초래했다. 그 지폐의 가치는 나날이 폭락하여, 결국 그것으로는 장작이나 식량 같은 현물을 사는 게 불가능해서 결국 헐값에 집을 팔게 된다. 집값으로 또 그 문제의 지폐를 받고 다시 시간이 흐르자 그 지폐는 휴지조각이 된다.

 

그리하여 가이아르 부인은 집을 잃고 전재산도 잃고 병도 얻어, 그녀가 결코 바라지 않던 가장 고통스럽고 가난하면서 외롭고 괴로운 죽음을 맞이한다. 그녀의 시신은 자루에 넣고 꿰매져 다른 50여 구의 시신들과 함께 옮겨져 공동묘지에 묻힌다.

 

 

엄밀히 따지면 가이아르 부인이 도덕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인간적으로나 잘못한 점은 찾기 힘들다. 신념에 따라 행동하고 열심히 일했으며 성실한 사람이었고, 모두에게 공평하게 냉정했다. 심지어 자기 자신에게도.

 

그런데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고, 화폐가 바뀌었고, 물가가 폭등했다.

밖에서 일어나는 일은 가이아르 부인의 운명에 개인적으로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만 같았다. 자신은 한 순간도 쉬지 않고 열심히 일해 돈을 벌었고 그 돈으로 인생의 목표였던 자신의 집을 샀고, 그 집의 세입자들은 세를 지불했으니까.

하지만 어느 순간이다. 뭔가가 달라졌다.

세상이 변해도, 착한 마음과 인생의 인과응보와 신의 은총 같은 것이 우리를 그 테두리 속에서 보호해 줄 것이라는 선한 믿음은 그녀의 운명 앞에서 부질 없었다.

 

 

이것이 바로, 나만 착하게 성실히 살면 더 나은 세상이 될 거라는 당신들의 천국, 그것의 실체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