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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산보나 다니면, 그걸로 좋다

역시 많이 걷고 있다.
 
날씨가 이렇게 적당한 시기는 많지 않다. 마침 남자친구씨 이직 텀이 길어지고 있는 요즘 상황에, 이 날씨가 걷기 좋은 날씨고 우리 취미가 산보라는 것은 몹시 적절하다. 남자친구씨의 이직 텀이 길어지는 이유는, 새 가게가 오픈이 자꾸 늦춰지는 불안한 상황 때문이다. 수입은 없고 시간은 많고. 그렇다고 해서 이미 형성된 씀씀이가 줄어들진 않는다. 망할 놈의 스노브.
 
버스를 타고 서초 인근에 내린다. 대검찰청, 성모병원을 지나 반포 구식 아파트 단지에 들어선다. 다정한 풍경, 공간 활용의 효율성이 낮아 풍부한 녹지, 아파트 건물 높이만큼 자라 올라간 나무들, 복도식 아파트 아래 1층-반지하 공간에 틀어박혀 나를 관찰하는 고양이.
단지 끝에서 도로로 빠져나가는 작은 문을 열고 나가면 바로 반포대교 입구다. 잠수교를 걸어서 건넌다. 자전거가 종종 나를 앞지르고 한강의 비릿한 물냄새를 담은 바람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마구 불어온다. 땀이 씻겨나간다.
다리 끝에서 조금 망설이다 이태원이 아닌 용산 가족공원 방향으로 간다. 흙길이 걷고 싶을 때의 선택이다. 강을 벗어나 차도가 인근이니 다시 더워진다. 아이스크림을 하나 사서 먹으며 공원까지 간다. 둘어보다 지치면 국립중앙박물관에 들어가 오래된 물건에서 나는 냄새를 맡고 실내에서 땀을 식힌다.
때로는 그대로 이태원 방향으로 틀어서 녹사평에서 해방촌을 지나 남산으로 올라가기도 한다. 혹은 삼각지 방향으로 틀어서 전쟁기념관을 지나 숙대 뒤로 빠져서 만리재 방향으로 갈 수도 있다. 서울역이 가까워지면 종로, 시청까지 갈 용기가 생긴다. 시간이 많을 땐 종로를 통과해 대학로까지 걸어가기도 한다.
 
걷는 길은 큰 길에서 조금 떨어진 작은 골목을 선호한다. 집집마다 화분에 키우고 있는 고추와 호박, 주렁주렁 맺힌 것을 보기도 하고 담벼락에 이끼나 담쟁이를 보기도 한다. 하수구 뚜껑 사이에 솟아오른 잡초가 기특하다.
공원을 들어서게 되면 그 서늘한 공기게 놀란다. 실외기와 자동차가 없는 공간, 식물이 가득한 공간이 좋다. 내 피부가 함께 숨을 쉰다. 약수터가 있으면 소매를 걷어올리고 팔꿈치 위까지 물에 씻고 손수건으로 대충 닦아서 물기가 말라가는 느낌을 즐긴다.
시장에 들어서면, 어린애 머리 만한 자몽이 천원에 팔고 있으면 주워 담고, 가지나 애호박을 사기도 한다. 이걸로 나물도 하고 찌개도 끓여야지. 실한 야채 무게에 가방이 묵직해지지만 마음이 즐겁다.
 
5시가 다가오면 행선지를 정한다. 가까운 이태원에 가서 테라스에서 얼음통에 담은 샴페인 병에 맺히는 물방울을 보아도 좋고, 이수역 부근의 시장 안에서 전집이나 백반집에 가서 제육을 시키고 소주나 막걸리를 먹어도 좋다. 그날 보았던 길거리의 재미진 것들을 이야기하고 문득 핸드폰을 꺼내 하루종일 찍은 사진을 나눈다.
기분이 너무 좋아지면, 오늘은 집에 들어가지 말자고 하고 근처의 숙박시설을 알아보기도 한다. 렌즈 세척액과 그 외 필수품, 과자나 술 따위를 사서 들어가서 미리 양말과 속옷을 손빨래 해서 에어콘 옆에 널고 가운을 걸치고 텔레비전을 켠다.
 
그런 날들이다.
많이 웃고, 그래도 괜찮나 싶게 행복하다.